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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주말은 맞아 더운 여름 집에만 있기엔 힘들것 같아. 아이데리고 수도국산 박물관에 다녀왔다. 어른에게는 어릴적 동네 골목에서 놀던 그당시 향수


를 느낄 수 있었으며, 아이들에겐 그당시 부모가 살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설명 해주면 아이도 신기해 하고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좋았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70년대의 향수)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이다. 이 주변 일대가 매립되어 바다가 땅으로 변하고 공장이 지어지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는 이 자그마한 언덕은 바닷가의 조용한 소나무 숲이었다.
송림산은 산언덕 에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송현(松峴, 솔 고개)동, 송림(松林, 소나무 숲)동의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소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달동네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산이름이 바뀌게 된 데에는 근대 개항기 인천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니라 수질 또한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으로 물 확보가 큰 고민이었다.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한국정부는 1906년 탁지부(度支部)에 수도국 (水道局)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에 착수하였다.
‘수도국산’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하면서 생겼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

1908년에 제작된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원통형 콘크리트 구조로서 제수벨브(배수관의 단수, 유압조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1905년 일본인이 서울 과 인천 사이의 상수도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경인수도 설계를 완성했다. 이 설계도에 의하면 수원지(水源池)는 한강 연안의 노량진 일대이고 급수지역은 서울, 용산, 인천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송현배수지는 1906년 11월에 착공하여 1908년 준공되었으며 1910년 10월에 노량진 수원지 정수시설 을 준공해 노량진~인천 사이에 32.62㎞의 수도관을 부설하고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급수를 시작했다.
송현배수지는 부지면적 36,780㎡이고 5,000㎥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서 급수받는 지역은 동구 일원과 중구 일부 지역이고 저수능력은 20,000톤으로 준공 당시와 비슷하다.

  •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 사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3호
  • 사진엽서 이미지
    사진엽서(조선인천송림산朝鮮仁川松林山 수도배수지水道配水地, 일제강점기)
  • 인천상수도 급수 개통지인 송현배수지 사진
    인천상수도 급수 개통지인 송현배수지
    현재소재지 :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공원로 75-22

수도국산에 달동네가 생기기까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갑진년(甲辰年:1904년) 왜병이 전환국(典ㆍ局, 현 전동)자리 근처에 주둔 하였는데, 이 때 이곳 주민들을 강제로 철거시켜서 송현동 산 언덕에 새로 주거를 정해 주었다고 한다. 고일(高逸)의 인천석금(仁川昔今), 1955년

위 내용은 송현동 달동네의 형성 배경을 적은 귀중한 기록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상권을 박탈당하고 중국인에게는 일자리를 잃고 인천 동구 송현동, 송림동과 같은 신설 마을로 찾아들었다. 비탈진 소나무숲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하였다. 이어 한국전쟁(6.25)으로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들었으며, 1960-70년대에는 산업화와 함께 전라, 충청지역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었다. 산꼭대기까지 점차 작은 집들이 들어차면서 마침내 181,500㎡(5만5천여평) 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 가구가 모둠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도국산은 인천의 전형적인 달동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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